문화유산편지 글읽기
영의정을 통해본 대통령과 국무총리
작성자
작성일
2016-12-17 12:30
조회수
288


사진) 황희선생 묘(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금승리 산1번지)

설명) 조선왕조를 통하여 가장 명망 있는 재상 중 한분으로 칭송되었던 황희(1363~1452)의 묘소이다. 황희는 소신과 원칙을 지키는 강직한 선비였으며, 영의정을 지낸 18년 동안 조선의 기틀을 튼튼히 다진 참된 재상으로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있다. 그런 그에게도 가족문제를 비롯해 너무나도 많은 약점들을 가지고 있었다. 515년 동안 168명의 영의정들이 오늘날 우리사회의 인사청문회기준으로 재상을 찾는다면 몇 명이나 통과될까? 아마도 황희 정승은 분명하게 사퇴를 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지나치게 나 자신도 못 지켜온 도덕적 기준을 상대방에게 요구하는 과도기 사회에 살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사진출처) 문화재청 홈페이지(경기도 기념물 제34)


조선시대 최고의 중앙관직으로 품계가 정1품의 자리는 영의정(領議政)이다. 흔히 영상(領相)으로 불렸다. 고려의 제도를 이어받았던 조선은 점차 관제를 정비하면서 최고정무기관인 도평의사사를 14004월에 의정부로 개편하고, 그 최고관직을 영의정부사라 하였다. 의정부의 기능이 점차 강화되고 관제가 정비됨에 따라 영의정부사는 다시 영의정으로 개칭되어 직제로서의 확립을 보게 되었고, 이어서 1466[경국대전]의 편찬에 따라 성문화되었다.


영의정은 대개 좌의정을 역임한 원로대신이 임명되었다. 좌의정, 우의정과 함께 삼의정또는 삼정승이라 하였다. 삼정승은 육조로부터 올라오는 모든 공사를 심의하고, 국왕의 재가를 얻어 6조에 결과를 보내 사무를 시행하도록 하였다. 다만, 이조와 병조의 인사권과 병조의 군사동원, 형조의 사형수 이하의 죄수에 대한 처결만은 국왕이 담당 조()에 직접 지시로 시행되었다. 법제적으로는 국정의 최고책임자로 규정되었지만, 실제의 기능은 왕권이 강하고 약함에 따라 그 지위와 역할에는 상당한 변화가 있었다.


세조가 즉위하면서 영의정은 실권 없는 무력한 지위로 전락되었는데, 이는 단종 때 영의정 황보인과 좌의정 김종서 등의 정적이 세조의 행동을 크게 제약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영의정은 정부의 수반인 최고 관직으로 조선시대 전 기간을 통하여 존속되어 오다가, 1894년 갑오경장 때 의정부의 총리대신으로 명칭이 바뀌었고, 이후 내각총리대신또는 의정등으로 개칭되었다. 영의정은 오늘날의 국무총리에 비견되는 법제적 또 실권적 기능을 수행하여왔다.


지난주 박근혜대통령은 헌법재판소에서 탄핵가부에 대한 심의가 시작되면서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을 시작하고 있다. 그리고 대통령선거 시절부터 모든 대통령 후보자들은 대통령에게 과도하게 집중된 권한을 총리에게 이양하겠다며 책임총리제 실시를 약속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무총리가 책임총리로서 권한을 가지고 정부의 내치(內治)를 총괄하여 왔는지 의문이 가기도한다.


조선시대에는 영의정 자리를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이라고 하였다. ‘만인지상이 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최고 권력자인 국왕이 영의정에게 어느 정도 권력을 넘겨주어야만 영의정의 권력행사가 가능하다. 권력은 그 속성상 나누기 어려운 것이다. 국왕이 무얼 믿고 영의정에게 권력을 나누어 줄 수 있을까. 믿었던 영의정이 국왕에게 도전하는 세력으로 돌변 할 수 있기 때문에 이상적 권력분배와 현실적 권력분배사이에 늘 미묘한 차이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오랜 인류의 역사에서 알 수 있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어 오늘날의 일이지하 만인지상의 자리는 국민들의 투표에 의하여 뽑혀진 대통령이다. 영의정에게 권력을 주는 것은 한 명의 왕이었지만 대통령에게 권한을 주는 것은 국민들이기 때문이다. 대통령은 국민으로부터 권한을 부여받은 2인자답게 국민지하 만인지상(國民之下 萬人之上)’ 으로서 3인자 국무총리와 함께 1인자 국민들의 뜻에 따라 시원스럽고 명쾌하게 국민의 뜻을 받드는 국가로 운영되었으면 해본다.(2014.6.14. 85호 문화유산편지를 일부 수정한 편지입니다.)

첨부파일
169. 황희 묘소.jpg
목록